티스토리 뷰

1. 사계절 제주의 아름다움
영화 올레를 보고 나니, 제주도의 사계절이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았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고 지금도 바쁜 도심 한복판에서 살고 있는 내게, 제주도의 사계절은 영화 속 풍경처럼 낯설고도 아름답게 다가왔다. 서울의 계절은 빠르게 흘러가고, 계절이 바뀌는 순간조차 놓칠 때가 많다. 반면 올레 속 제주도는 천천히, 그리고 선명하게 계절을 살아내고 있었다.
제주의 봄은 단연 유채꽃이다. 영화 속 장면 중 노란 유채꽃밭을 배경으로 인물들이 걸어가는 모습은 정말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서울의 봄은 벚꽃이 피기 무섭게 지고, 미세먼지 속에서 마스크로 숨을 막으며 보내기 일쑤다. 반면 제주의 봄은 유채꽃과 맑은 공기, 바닷바람이 조화를 이루며 감성적인 봄날을 완성한다.
여름의 제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다. 영화 속 푸른 바다와 휘몰아치는 바람, 해안 도로를 달리는 장면을 보면서 서울의 여름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 여름은 뜨거운 아스팔트와 지하철의 열기로 기억되지만, 제주의 여름은 바람이 시원하고 바다 색이 유난히 맑다. 한낮의 태양 아래서도 자연이 사람을 쉬게 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가을의 제주는 억새로 물든 오름과 깊고 맑은 하늘이 인상적이다. 올레 속 주인공들이 한적한 오름을 걸으며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보며, 서울에서의 가을을 떠올렸다. 서울에선 가을이 왔는지조차 모른 채 바쁜 일정 속에 흘려보내기 일쑤다. 반면 제주는 걷는 것만으로 계절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겨울의 제주는 조용하고 차분하다. 영화 후반부, 바닷가에 앉아 멀리 섬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공기는 서울의 겨울과 전혀 달랐다. 서울의 겨울은 연말 행사와 복잡한 거리, 매서운 바람이 먼저 떠오르지만, 제주의 겨울은 더 고요하고 투명하다. 눈 덮인 돌담길, 파도가 느리게 부서지는 해안가의 풍경은 정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2. 제주시민이 말하는 출연진
제주 토박이 눈으로 보면 영화 올레는 참 정겹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그 느낌을 살려주는 게 출연진입니다. 제주 올레길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인 만큼, 그 안을 채우는 인물들이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걸 아주 잘 해냈지요. 제주도의 들판처럼 소박하고, 바람처럼 솔직한 배우들이 한데 어우러졌습니다.
먼저 신하균 배우는 극 중에서 강두식이라는 검사 출신 인물로 등장합니다. 서울살이 냄새가 물씬 나는 인물이지만, 제주에 오면서 조금씩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속정 깊은 사람들, 제주에도 그런 이들이 많지요. 바람 많은 겨울 바닷가처럼 조용하지만 강단 있는 인물입니다. 신하균 씨가 보여주는 눈빛 연기가 그런 정서를 담아냅니다.
오만석 배우는 조병기 역을 맡았는데, 처음엔 어색하고 소심한 인상이지만 보면 볼수록 사람 냄새가 나는 인물입니다. 마치 동네에 한 명쯤 있는, 묵묵히 자기 삶을 살아가는 착한 이웃 같은 느낌이지요. 말은 많지 않아도 우정 하나만큼은 지키려는 진중한 태도가 제주 사람들의 정서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박희순 배우가 연기한 민우식은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틀에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캐릭터인데, 제주 사람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장터에서 만나는 말 많고 정 많은 형님, 처음 본 사람에게도 말을 툭툭 던지지만 정이 묻어나는 그런 느낌이랄까요? 유쾌하지만 진심은 놓치지 않는 그의 연기는, 영화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3.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
단지 시기가 겹쳤다는 이유만으로 이 영화가 특별하게 느껴졌던 건 아니다. 스크린 속에 펼쳐진 제주 풍경이 멀게만 느껴지지 않고, 내 눈에 익은 색감과 바람의 결까지도 그대로 담겨 있어 마치 또 한 번 여행을 다녀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영화는 세 친구가 갑작스러운 제주 여행을 통해 우정과 인생의 전환점을 되짚는 이야기다. 나 역시 두 명의 친구와 함께 제주를 다녀왔다. 일정은 빽빽하지 않았고, 그저 걷고, 먹고, 쉬는 게 전부였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꽉 찼던 기억이다. 우리는 올레길 5코스를 따라 걸었는데, 귤밭 너머로 드러난 푸른 바다와 오름 위로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돌담길의 정적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조용한 길 위에서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 때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함께 걷던 순간이 오래도록 남았다.
영화 속 인물들도 별다를 것 없이 제주를 걷고, 웃고, 다투고, 화해한다. 그런데 그 안엔 도시에서 살아가며 미처 꺼내지 못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제주라는 공간이 주는 여유, 낯선 자연 속에서 생기는 작은 솔직함이 그 감정들을 조금씩 끄집어낸다.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이라 느껴졌다.
사람은 바쁜 일상 속에선 자신조차 놓치기 쉽다. 영화 올레는 그 놓친 부분을 다시 되짚게 만든다. 함께 걷는 친구가 얼마나 소중한지, 오래된 관계일수록 더 많은 이해와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 제주에서의 짧은 여행을 통해 나 역시 같은 걸 느꼈다. 파도 소리와 바람이 큰 말 없이도 감정을 정리해 주었고, 그 시간들이 내게 ‘괜찮다’는 위로를 건넸다.
올레는 단순한 여행 영화가 아니다. 제주라는 풍경은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을 보듬고 변화시키는 하나의 ‘인물’처럼 작용한다. 여행에서 돌아와 이 영화를 본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가 제주에서 위로받은 건 단지 풍경 때문이 아니라, 그 풍경 속에서 마음을 열 수 있었던 사람들 덕분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