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들을 향한 아빠의 사랑
사람들은 내가 말이 없다고 한다.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 못 한다고. 맞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하나만큼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나는 내 아들 민재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말로 다 못해도, 몸으로는 언제든 보여줄 수 있다.
민재가 어릴 때는 내 손이 필요했다. 밥 먹여주고, 학교 데려다주고, 밤마다 잠든 얼굴 바라보며 조용히 등을 두드려줬다. 그때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많았다. 하지만 애가 크고, 말수가 줄고, 점점 나랑 눈도 안 마주치게 되면서… 나는 점점 서툴러졌다.
마음은 여전한데, 표현하는 법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민재가 레슬링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을 때, 솔직히 속으로는 무너졌다. 나는 그 애가 나와 같은 길을 걸을 거라고 믿었고, 또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는 뭐라 하지 못했다. 고집부리면 아이를 더 멀어지게 할 것 같아서. 그래서 그날 밤, 체육관 불 다 끄고 혼자 남아서 오래 앉아 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그냥 가슴만 답답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민재가 친구들과 다퉜던 날이다. 말없이 문을 꽝 닫고 방에 들어갔던 그 얼굴. 나는 아무 말 없이 된장찌개를 끓였다. 그 애가 어릴 때 좋아하던, 엄마 없이 내가 겨우겨우 끓이던 그 맛. 말은 안 해도, 국물 한 숟갈 뜨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날 민재가 내 옆에 조용히 앉아 밥을 먹던 순간, 나는 눈물이 날 뻔했다. 말없이 마음을 전하는 건,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가장 진한 사랑이라고 믿는다.
나는 대단한 아빠가 아니다. 화려한 직업도 없고, 뭔가 잘난 것도 없다. 다만, 아들이 넘어지면 달려가 먼저 손 내밀 준비는 되어 있다. 그 애가 말하지 않아도, 언제든 옆에 있을 거다. 뒤에서 지켜보다가, 필요할 땐 누구보다 빠르게 앞에 나서줄 사람. 그게 바로 나다
2. 아빠를 향한 아들의 질투
아빠와 나는 둘만의 시간이 많았다. 엄마 없이 살아온 세월이 길었고, 체육관 매트 냄새에 둘러싸인 하루하루가 익숙했다. 서로 말은 많지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아빠 곁을 자꾸 맴도는 성경 누나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아빠 친구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라고.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아빠한테 반말하고, 어깨를 툭 치고, 웃으며 밥을 먹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거라고 했다.
근데 이상했다. 누나의 시선이 아빠를 오래 머무를수록, 그 웃음이 깊어질수록… 나는 자꾸 신경이 곤두섰다.
아빠는 그걸 모르는 듯,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건지. 누나가 반찬을 챙겨 오면 고맙다며 허허 웃고, 체육관에 찾아오면 자리를 내준다. 그 모습이 싫었다. 아니, 무서웠다.
누나가 우리 둘 사이에 들어와, 내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 일부를 가져가 버릴까 봐.
아빠의 시선이, 대화가, 미소가 조금씩 그 사람에게로 옮겨가는 걸 보는 건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아직도 아빠가 내 편이길 바란다.
민재의 아빠, 그 한 자리로 충분했던 사람인데… 어느새 성경 누나가 그 옆에 자꾸 섰다.
누나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아빠를 잘 이해했다. 레슬링 얘기도 척척 맞췄고, 아빠의 옛날이야기에도 웃어줬다.
나는 그럴수록 점점 대화에 끼지 못했고, 어느샌가 그 둘 사이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아빠가 잘못한 건 없다. 그저 한 사람을 좋아하게 된 것뿐이다.
그 사람이 친구이든, 가족이든, 누가 되었든 간에 사랑은 다가올 수 있다.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나에겐 그 변화가 낯설고, 외롭고, 아프다.
아빠는 여전히 내 곁에 있는데, 나는 자꾸만 혼자 남겨진 기분이다.
사랑이란 건 어른들만 하는 줄 알았다.
근데 지금 나는, 너무 유치하게도… 아빠를 누군가와 나눠 가질까 봐, 질투하고 있다.
그 감정이 쌓일수록 아빠를 향한 말들이 날카로워지고, 누나에게는 괜히 차가워졌다.
나도 안다. 이 마음은 어쩌면 나만의 성장통이라는 걸.
그렇지만 지금은 아직, 아빠를 나만의 아빠로 두고 싶은 마음뿐이다.
3. 등장인물의 삼각관계
사실 처음부터 귀보 씨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졌던 건 아니었다. 그냥 성실하고, 아들 하나 잘 키우는 좋은 아빠.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정하고 책임감 있는 체육관 관장.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눈이 갔다. 말수는 적지만 행동은 진심이고, 어색하게 웃는 그 미소 하나에 마음이 자꾸 흔들렸다.
그래서 나름대로 용기를 냈다. 김치도 담가서 건네고, 체육관에도 퇴근길마다 들렀다. 괜히 도와줄 일은 없나 눈치도 봤다. 귀보 씨는 늘 조용히, 하지만 성의껏 내 호의를 받아줬다. 그 작은 반응에도 괜히 혼자 들뜨고, 오래된 감정처럼 조심스러운 설렘이 피어났다. 이 사람이라면, 나도 다시 누군가를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런데 문제는 늘 곁에 있는 가영이었다. 귀보 씨와는 어릴 때부터 친구라더니, 너무 자연스럽고 가까웠다. 처음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만, 가영이 귀보 씨를 바라보는 눈빛은 친구의 것이 아니었다. 익숙하게 부엌에 들어가고, 체육관 매트에 주저앉아 장난을 치는 그 모습에서 나는 자꾸만 밀려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다가가는데, 가영은 이미 귀보 씨 일상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게 너무 부러웠고, 또 서러웠다.
귀보 씨는 그 마음을 알고 있을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걸까.
그 두 사람 사이엔 긴 시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정서가 있었고, 나는 거기 설 자리가 없어 보였다.
같이 웃고 있어도, 둘만의 이야기가 있고, 나만 모르는 언어로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질투라고 하기엔 내가 초라해 보이고, 포기하기엔 마음이 너무 깊다.
가영은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이다.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하고, 보고 싶으면 찾아간다.
나는 그런 게 서툴다. 혹시 귀보 씨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까, 괜히 어색해지진 않을까, 늘 생각만 하다 한 걸음씩 물러섰다.
그래서 오늘도 체육관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조용히 문을 밀고 들어간다.
혹시 또 가영이 있을까 봐 괜히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내가 만든 반찬을 내밀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그냥 동네 누나인 척 웃는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진심이다.
귀보 씨, 나는 지금도 조용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말로 다 못해도, 이 마음 하나만은 진짜예요.